로이히텐베르크의 요세피나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로이히텐베르크의 요세피나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비가 된 인물이다. 나폴레옹의 의붓 손녀이자, 바이에른 왕국의 막시밀리안 1세의 딸로, 1823년 스웨덴 왕세자 오스카르 1세와 결혼했다. 가톨릭 신자였지만, 스웨덴에서 뛰어난 예술 감각과 정치적 영향력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사회 개혁과 자선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보아르네가 - 마리아 2세
마리아 2세는 포르투갈의 여왕으로, 미겔 1세의 왕위 찬탈 후 망명 생활을 겪었으나 복위하여 교육 개혁에 힘썼으며, 정치적 혼란 속에서 통치하다 출산 중 사망하였다. - 보아르네가 - 외젠 드 보아르네
외젠 드 보아르네는 나폴레옹의 의붓아들로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을 역임하고 군사적 활약을 펼쳤으며,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지위를 받았고,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 아말리에 폰 바이에른과 결혼하여 뮌헨에서 사망했다. - 노르웨이의 왕비 - 마르그레테 1세
마르그레테 1세는 14세기 말 칼마르 동맹을 성립시켜 스칸디나비아 3국을 통합한 덴마크 여왕이자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섭정으로, 아들 올라프 2세 사후 에리크를 후계자로 삼아 3국의 왕으로 옹립하여 동맹을 통치하며 북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노르웨이의 왕비 - 데지레 클라리
프랑스 출신 데지레 클라리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약혼했으나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와 결혼하여 그의 스웨덴 국왕 즉위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비가 되었고, 그녀의 후손들은 현재 유럽 여러 왕실에 퍼져 있다. - 스웨덴의 왕비 - 마르그레테 1세
마르그레테 1세는 14세기 말 칼마르 동맹을 성립시켜 스칸디나비아 3국을 통합한 덴마크 여왕이자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섭정으로, 아들 올라프 2세 사후 에리크를 후계자로 삼아 3국의 왕으로 옹립하여 동맹을 통치하며 북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스웨덴의 왕비 - 데지레 클라리
프랑스 출신 데지레 클라리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약혼했으나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와 결혼하여 그의 스웨덴 국왕 즉위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비가 되었고, 그녀의 후손들은 현재 유럽 여러 왕실에 퍼져 있다.
로이히텐베르크의 요세피나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왕위 계승 | 스웨덴 왕비 및 노르웨이 왕비 |
통치 기간 | 1844년 3월 8일 – 1859년 7월 8일 |
대관식 | 1844년 9월 28일 (스웨덴) |
배우자 | 오스카르 1세 (1823년 결혼, 1859년 사망) |
자녀 | 칼 15세 구스타프 오스카르 2세 유셰니 공주 아우구스트 |
전체 이름 | 조제피네 막시밀리아네 외제니 나폴레오네 드 보아르네 (Joséphine Maximiliane Eugénie Napoléonne de Beauharnais) |
가문 | 보아르네 가문 |
아버지 | 외젠 드 보아르네 |
어머니 | 아우구스테 폰 바이에른 |
![]() | |
출생일 | 1807년 3월 14일 |
출생지 | 밀라노, 나폴레옹 왕국 이탈리아 |
사망일 | 1876년 6월 7일 |
사망지 | 스톡홀름, 스웨덴 |
매장지 | 리다르홀름 교회 |
종교 | 가톨릭 교회 |
작위 | |
기타 작위 | 갈리에라 여공작 이탈리아 공주 |
2. 가족
외젠 드 보아르네와 바이에른 공주 아우구스테의 장녀로 태어났다.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손녀이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의붓 손녀였으며, 나폴레옹 3세와는 사촌 관계였다.
어머니 쪽으로는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외손녀였으며, 유럽의 여러 왕가와 친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동생들로는 호엔촐레른-헤힝겐의 공비가 된 우제니,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와 결혼한 아우구스트,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와 결혼한 아멜리, 뷔르템베르크 백작과 결혼한 테오돌랭드, 러시아 여대공 마리야 니콜라예브나와 결혼한 막시밀리앙이 있었다.
의붓 할아버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시아버지 칼 14세 요한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였는데, 이는 칼 14세 요한이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2. 1. 혈연
외젠 드 보아르네와 바이에른 공주 아우구스테의 장녀로 태어났다. 할머니이자 나폴레옹의 첫 번째 황후였던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이름을 따서 조제핀이라 지어졌다. 세례명은 조제핀 막시밀리안느 외제니 나폴레오느 (Joséphine Maximilienne Eugénie Napoléone)였다.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와 조제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외젠은 조제핀의 아버지였기에, 조제핀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의붓 손녀가 된다.조제핀 황후는 조제핀의 할머니였으며, 네덜란드의 왕비였던 오르탕스는 고모였다. 따라서 조제핀은 나폴레옹 3세와 사촌 간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바이에른의 첫 번째 국왕인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였다. 그의 딸들은 오스트리아 황후, 프로이센의 왕비, 작센의 왕비, 오스트리아 황제의 어머니, 오스트리아 황후의 어머니였다. 이 때문에 조제핀과 그녀의 형제 자매들은 유럽의 유력 왕가와 친인척 관계가 되었으며, 그들 역시 중요한 인물들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조제핀의 동생 우제니는 호엔촐레른가의 가톨릭 분가였던 호엔촐레른-헤힝겐의 공비였다. 둘째 동생 아우구스트는 포르투갈의 여왕 마리아 2세와 결혼했다. 셋째 동생 아멜리는 오빠의 장인인 멕시코 황제 페드루 1세와 결혼해서 멕시코의 황후가 되었다. 넷째 동생 테오돌랭드는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분가 출신인 뷔르템베르크 백작과 결혼했다. 막내 동생 막시밀리앙은 러시아 니콜라이 1세의 장녀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과 결혼하여 로마노프스키공 칭호를 받았으며 러시아 황실 가족으로 인정받았다.
의붓 할아버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시아버지 칼 14세 요한은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였는데, 이는 칼 14세 요한이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2. 2. 형제자매
이름 | 생몰년 | 배우자 |
---|---|---|
아우구스트 | 1810년 ~ 1835년 | 마리아 2세 (포르투갈 여왕) |
아멜리 | 1812년 ~ 1873년 | 페드루 1세 (브라질 황제) |
외제니 | 1808년 ~ 1847년 | 콘스탄틴 (호엔촐레른헤힝겐 후작) |
테오돌랭드 | 1814년 ~ 1857년 | 빌헬름 (뷔르템베르크 공작) |
막시밀리앙 | 1817년 ~ 1852년 |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러시아 여대공) |
2. 3. 혼인과 자녀
오스카르 1세와의 사이에서 4남 1녀를 두었다.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칼 15세 | 1826년 | 1872년 |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 네덜란드의 루이제와 결혼 |
구스타프 왕자 | 1827년 | 1852년 | 웁살라 공작, 미혼으로 사망 |
오스카르 2세 | 1829년 | 1907년 |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 나사우의 소피아와 결혼 |
유셰니 공주 | 1830년 | 1889년 | 미혼으로 사망 |
아우구스트 왕자 | 1831년 | 1873년 | 달라르나 공작, 작센 알텐부르크의 테레제와 결혼 |
요세피나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나폴레옹 몰락 후 외할아버지의 배려로 아버지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작위를 받은 뒤 부모와 함께 뮌헨에서 살았다. 유럽 여러 통치 왕가로 시집간 이모들과 친하게 지냈다.
스웨덴의 칼 14세 요한은 빈 회의의 정통주의 정책을 두려워했고, 베르나도트 왕가가 유럽의 오래된 왕가와 혈연 관계를 맺기를 원했다. 그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오스카 왕세자의 결혼은 이 문제의 해결책이었고, 1822년 그는 마침내 아들에게 결혼에 동의하고, 왕세자비 후보 명단을 확인하기 위해 유럽을 방문하도록 강요했다. 이 명단에서 덴마크의 빌헬미네 마리 공주가 첫 번째 후보였고, 로이히텐베르크 공주가 두 번째, 헤센의 마리 프레데리카 공주가 세 번째, 바이마르 공주가 네 번째였다.[2] 칼 14세 요한은 요세피나가 어머니를 통해 유럽의 오래된 왕가와, 아버지를 통해 보나파르트 왕가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두 번째 후보로 선택했으며, 그는 이 문제를 "새로운 이해관계와 오래된 이해관계를 결합했다"라고 표현했다.[3]
오스카 왕세자는 덴마크 공주와의 결혼을 거절했지만, 1822년 8월 23일 아이히슈테트에서 요세피나와 처음 만난 후 로이히텐베르크 공주에게 관심을 표명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사랑에 빠진 것으로 전해지며, 양가 모두 결혼을 받아들여 정식으로 성사되었다. 요세피나는 스웨덴어를 배우고 결혼 전까지 오스카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루터교로 개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지만, 스웨덴 대표들은 그녀에게 종교를 유지할 수 있는 선택권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4]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교 신자였지만, 자녀를 루터교 신앙으로 키우는 데 동의했다. 그녀는 가톨릭 사제를 데려와 개인 가톨릭 예배당에서 정기적으로 미사와 고해성사를 했다. 교황은 이에 동의했다. 스웨덴에서는 1781년 법, ''관용칙령''이 외국인과 이민자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언했으며, 요세피나와 시어머니 데지레는 그러한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5] 그러나 스웨덴 사람들에게 루터교에서 다른 종교로의 개종은 공식적으로 재산 몰수와 국외 추방을 의미했다. 노르웨이의 상황도 비슷했다. 루터교 성직자들은 이 결혼에 반대했지만 국왕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요세피나 공주는 1823년 5월 22일 뮌헨의 로이히텐베르크 궁전에서 대리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또한 1823년 6월 19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직접 결혼식을 올렸다. 첫 번째 결혼식은 가톨릭식이었고, 두 번째 결혼식은 루터교식이었다. 어머니를 통해 (그녀의 모계 혈통은 헤세, 하나우, 안스바흐, 바덴-두를라흐, 클레부르크를 거쳐) 요세피나는 스웨덴의 구스타브 1세와 스웨덴의 칼 9세의 후손이었고, 그녀의 자녀는 구스타브 바사의 후손이 되었다. 그녀는 또한 외할아버지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를 통해 로렌의 레나타,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의 손녀의 후손이기도 했다.
요세피나는 11년 만에 스웨덴에 돌아온 시어머니 데지레리아 여왕과 함께 스웨덴에 도착했다. 그들은 1823년 6월 13일 스톡홀름 외곽의 마닐라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칼 14세 요한 국왕, 오스카 왕세자, 군대 사열과 많은 군중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하가 궁전으로 호송되어 퀘들린부르크 수도원장 소피아 알베르티나 공주의 환영을 받았다. 두 번째 결혼식은 6일 후에 열렸다. 그녀는 스웨덴에 도착한 지 6일 만에 중간 이름 '나폴레온'이 삭제되었는데, 이는 스웨덴이 최근 전쟁에서 보나파르트와 싸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버지 쪽 할머니를 위해 파리에서 제작된 여러 점의 특별한 보석을 가져왔는데, 이는 현재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왕가(루이즈와 마르타를 통해) 소유이다. 스웨덴에서는 그녀는 이름의 스웨덴어 버전인 '요세피나'로 알려졌다.
3. 생애
1823년 스웨덴 왕위계승자 오스카르와 결혼하여 스톡홀름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후 스웨덴에서 결혼한 왕위계승자들은 모두 6월 19일에 결혼했다. 스웨덴에서는 "요세피나"로 불렸다. 가톨릭 교도였고 나폴레옹과 가까운 친척이었기에 개신교 국가이며 반(反)나폴레옹 정서가 강했던 스웨덴에서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외모, 뛰어난 예술 감각과 후원으로 스웨덴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인기 있는 왕비가 되었다.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남편에게 정부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남편을 믿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나폴레옹 1세의 첫 번째 아내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의붓아들인 외젠 드 보아르네와 바이에른 왕국 왕 막시밀리안 1세의 딸 아우구스테 폰 바이에른의 장녀로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나폴레옹 3세의 외사촌이다. 1823년 스웨덴 왕세자 오스카르와 뮌헨의 로이히텐베르크 궁전에서 결혼했고, 같은 해 6월 19일 스톡홀름에서 다시 결혼식을 올렸다.
스웨덴에 도착하자 나폴레옹 전쟁으로 상처 입은 국민 감정을 고려하여 이름에서 "나폴레오누"라는 중간 이름이 삭제되었다. 남편 오스카르와 서로 사랑하며 결혼 생활을 했지만,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후 큰 충격을 받았다. 원예와 회화에 취미가 있었고, 자선과 개선 활동에 참여했다. 평생 가톨릭 신자였지만, 자녀들을 루터교로 교육하는 데 동의했다. 신앙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왕세자비 시절부터 스웨덴 국민들에게 높은 인기를 얻었다.
3. 1. 초기 생애 (1807-1823)
요세피나는 1807년 3월 14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외젠 드 보아르네와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타 공주 사이의 여섯 자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1] 아버지 쪽 할머니는 나폴레옹의 첫 번째 부인인 조제핀 드 보아르네였으며, 나폴레옹의 요청에 따라 '조세핀'이라는 이름을 받았다.[1] 외할아버지는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국왕이었다.
태어날 때, 요세피나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볼로냐 공주'' 칭호를 받았고, 이후 갈리에라 여공작이 되었다. 처음 7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으며, 가족은 밀라노의 빌라 보나파르테와 몬차의 여름 별장에서 지냈다. 1812년에는 전 황후 조제핀의 방문을 받기도 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부모는 바이에른으로 떠났고, 요세피나와 형제자매들은 아버지의 전 비서였던 다네 남작과 함께 그들을 따라갔다. 요세피나의 아버지는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이라는 칭호와 아이히슈테트 공국을 봉토로 받았다. 가족은 여름을 아이히슈테트에서, 겨울을 뮌헨에서 보냈다.
1823년, 요세피나는 스웨덴의 왕위계승자였던 오스카르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1822년 8월 23일 아이히슈테트에서 처음 만났고, 서로에게 호감을 느껴 사랑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요세피나는 스웨덴어를 배우고 오스카르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자녀를 루터교 신앙으로 키우는 데 동의했다. 1823년 5월 22일 뮌헨의 로이히텐베르크 궁전에서 대리 결혼식을 올렸고, 6월 19일 스톡홀름에서 직접 결혼식을 올렸다.
3. 2. 스웨덴 왕세자비 시절 (1823-1844)
요세피나는 1823년 스웨덴의 왕위계승자였던 오스카르와 결혼했다. 오스카르와 요세피나는 스톡홀름에서 6월 19일에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후 스웨덴에서 결혼한 왕위계승자들은 모두 6월 19일에 결혼했다. 스웨덴에서는 스웨덴식으로 "요세피나"라고 불렸다. 그녀는 가톨릭 교도였고 나폴레옹과 가까운 친척이었기에, 신교의 나라이며 반(反)나폴레옹 정서가 강했던 스웨덴에서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예술 감각, 그리고 예술에 대한 후원은 스웨덴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훗날 요세피나 왕비는 매우 인기 있는 왕비가 되었다.[1]
오스카 왕세자는 덴마크 공주와의 결혼을 거절했지만, 1822년 8월 23일 아이히슈테트에서 요세피나와 처음 만난 후 로이히텐베르크 공주에게 관심을 표명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사랑에 빠진 것으로 전해지며, 양가 모두 결혼을 받아들여 정식으로 성사되었다. 요세피나는 스웨덴어를 배우고 결혼 전까지 오스카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루터교로 개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지만, 스웨덴 대표들은 그녀에게 종교를 유지할 수 있는 선택권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4]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교 신자였지만, 자녀를 루터교 신앙으로 키우는 데 동의했다. 그녀는 가톨릭 사제를 데려와 개인 가톨릭 예배당에서 정기적으로 미사와 고해성사를 했다. 교황은 이에 동의했다. 스웨덴에서는 1781년 법, ''관용칙령''이 외국인과 이민자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언했으며, 요세피나와 시어머니 데지레는 그러한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5] 그러나 스웨덴 사람들에게 루터교에서 다른 종교로의 개종은 공식적으로 재산 몰수와 국외 추방을 의미했다. 노르웨이의 상황도 비슷했다. 루터교 성직자들은 이 결혼에 반대했지만 국왕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요세피나 공주는 1823년 5월 22일 뮌헨의 로이히텐베르크 궁전에서 대리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또한 1823년 6월 19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직접 결혼식을 올렸다. 첫 번째 결혼식은 가톨릭식이었고, 두 번째 결혼식은 루터교식이었다. 어머니를 통해 (그녀의 모계 혈통은 헤세, 하나우, 안스바흐, 바덴-두를라흐, 클레부르크를 거쳐) 요세피나는 스웨덴의 구스타브 1세와 스웨덴의 칼 9세의 후손이었고, 그녀의 자녀는 구스타브 바사의 후손이 되었다. 그녀는 또한 외할아버지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를 통해 로렌의 레나타,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의 손녀의 후손이기도 했다.
요세피나는 11년 만에 스웨덴에 돌아온 시어머니 데지레리아 여왕과 함께 스웨덴에 도착했다. 1823년 6월 13일 스톡홀름 외곽의 마닐라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칼 14세 요한 국왕, 오스카 왕세자, 군대 사열과 많은 군중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하가 궁전으로 호송되어 요세피나는 퀘들린부르크 수도원장 소피아 알베르티나 공주의 환영을 받았다. 두 번째 결혼식은 6일 후에 열렸다. 그녀는 스웨덴에 도착한 지 6일 만에 중간 이름 '나폴레온'이 삭제되었다. 이는 스웨덴이 최근 전쟁에서 보나파르트와 싸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버지 쪽 할머니를 위해 파리에서 제작된 여러 점의 특별한 보석을 가져왔는데, 이는 현재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왕가(루이즈와 마르타를 통해) 소유이다.
요세피나는 스웨덴에 도착한 순간부터 사교계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개인적인 면과 공적인 면 모두에서 뛰어났으며, 선임자이자 후임자인 여왕보다 더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미 왕세자비로서, 그녀는 시어머니가 할 수 없었던 대표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고, 새로운 왕조가 스웨덴에서 인기를 얻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824년 여름, 왕세자와 왕세자비는 노르웨이의 크리스티아니아를 방문하여 군주제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많은 공개 활동을 펼쳤다. 오스카는 방문 기간 동안 임시 부왕의 임무를 맡았고, 요세피나는 그가 스토르팅 앞에서 나타났을 때 관람석에 있었다. 그 후, 그들은 그녀를 대중에게 소개하기 위해 스웨덴을 여행했다. 그녀는 매력적이고 아름다우며 위엄있는 여성으로 묘사되었으며, 재능도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거의 유창하게 스웨덴어를 구사하여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시아버지와 매우 따뜻한 관계를 유지했다. 국왕은 그녀를 매우 다정하게 대했고, 예를 들어, 사탕을 주머니에 숨겨두곤 했는데, 그녀는 그것을 찾아내어, 한 번은 사탕 속에 숨겨진 보석을 찾기도 했다.[6] 1823년 8월 21일, 샤를 14세 요한은 그가 왕세자로 선출된 날짜인 이날을 요세피나의 생일로 지정하고, 이후 요세피나 데이로 기념하도록 선포했다. 이러한 첫 번째 행사는 그날 드로트닝홀름 궁전에서 열렸고, 요세피나 데이는 그 후 수십 년 동안 스웨덴에서 기념되었다.
요세피나와 오스카의 관계는 처음에는 서로 행복한 관계로 묘사되었고, 부부는 문화, 그림, 글쓰기, 노래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다.[8] 오스카와 요세피나 사이에는 다섯 명의 자녀가 있었고, 그 중 두 명이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오스카는 혼외 관계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고, 이 사실은 질투심에 시달리는 요세피나를 깊이 괴롭혔다.[9] 1832년, 막내 아이를 낳은 지 1년 후, 그녀는 일기에 남편의 외도를 인내해야 한다는 당시의 여성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여자는 침묵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하며, 이러한 당시의 견해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11] 1835년, 오스카의 행동에 대한 그녀의 고통은 그녀가 신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메데비 온천을 방문하게 만들었다.[1] 그녀의 남편과 유명 여배우 에밀리 호그퀴스트의 관계는 널리 알려졌다. 1837년, 오스카와 에밀리 호그퀴스트는 바트엠스에서 만났다.[13] 요세피나는 오스카와 에밀리 호그퀴스트의 관계가 지속된 몇 년을 "불 속을 걷는" 것과 같다고 묘사했다.[14]
요세피나는 정원 가꾸기와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의 예술에 대한 관심은 적극적이고 진실했다. 그녀는 화가(이자 가톨릭 개종자) 소피아 아들러스파레의 경력을 지원했고, 재능있는 아마추어 예술가가 된 자신의 딸 에우제니 공주의 예술적 관심과 재능을 장려했다. 1836년, 그녀는 어머니, 오빠, 두 여동생의 방문을 받았다. 1843년, 그녀는 어머니를 뮌헨에서 방문했다.
요세피나는 사회 개혁과 자선 사업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는 여러 자선 단체를 직접 설립하기도 했다. 이미 왕세자비 시절, 그녀는 일주일에 두 번 도움을 요청하는 청원자들을 받았고, 그녀의 활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확대되었다. 그녀의 주요 관심사는 가난한 여성과 어린이 지원이었다. 그녀는 1826년 가난한 과부를 위한 ''Sällskapet de fattigas vänner''('가난한 자의 친구 협회')를 설립했고, 1827년에는 가난한 어머니를 지원하기 위한 ''Sällskapet för uppmuntran av öm och sedlig modersvård''('부드럽고 적절한 모성 간호를 위한 협회')를, 1833년에는 여성 고용 기관인 ''Sällskapet för arbetsamhetens uppmuntran''('노동 장려 협회')와 ''Kronprinsessans slöjdskola för fattiga flickor''('왕세자비의 가난한 소녀들을 위한 수공예 학교')를 설립했다.[16]
요세피나는 왕궁에 자체 가톨릭 예배당을 가지고 있었다. 1837년 9월 16일, 스톡홀름의 산타 에우게니아 교회가 그녀와 슈타다흐의 노력으로 설립되었다. 이것은 종교 개혁 이후 스칸디나비아 최초의 가톨릭 교회였으며, 스칸디나비아 최초의 사도 대리구가 되었다. 노르웨이는 1841년에 통합되었다. 그녀는 일요일마다 그곳에서 미사에 참석했다.
3. 3. 스웨덴 왕비 시절 (1844-1859)
1844년 시아버지 칼 14세 요한이 사망하자 남편 오스카르가 오스카르 1세로 즉위하면서 조세핀은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비가 되었다. 같은 해 9월 28일 스톡홀름에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종교 문제로 반대 여론도 있었지만, 오스카르 1세는 왕비의 대관식이 무산되면 자신도 대관식을 치르지 않겠다고 강경하게 대응하여 이를 해결했다.[1] 그러나 노르웨이에서는 가톨릭 신자의 대관식에 대한 반대가 더 심했고, 결국 오스카르 1세는 노르웨이에서의 대관식을 포기했다.
조세핀 왕비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남편의 조언자 역할을 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1] 오스카르 1세는 국정 운영에 대한 압박감을 느낄 때마다 조세핀 왕비에게 의지했으며, 위기 상황에는 함께 은밀하게 문제 해결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외교 정책에서도 조세핀 왕비의 영향력은 컸다. 1848년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 당시 사촌인 프로이센 왕비 엘리자베트 루도비카 폰 바이에른에게 서신을 보내 평화 협상을 중재했으며, 프로이센 측에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1] 또한 1850년대 유럽 위기 상황에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 부부와 긴밀하게 소통하며 스웨덴의 외교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조세핀 왕비는 친프랑스, 반러시아 성향으로 알려져 있으며, 1855년 스웨덴, 노르웨이, 프랑스, 영국 간의 11월 조약 체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세핀 왕비는 국내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1845년 남녀 동등 상속법 제정, 감옥 및 사회 복지 개혁, 1846년 길드 폐지 등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0] 1848년 유럽 혁명의 여파로 스톡홀름에서 폭동이 발생했을 때, 군중에게 발포하지 말 것을 남편에게 요청하기도 했다.[1]
조세핀 왕비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종교 문제로 인해 일부 국민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종교의 자유를 위한 정책 추진 과정에서 가톨릭 교회의 이익을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1850년대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여성들이 추방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1860년 종교의 자유가 도입되면서 이러한 갈등은 점차 해소되었다.
조세핀 왕비는 노르웨이에도 애정을 갖고, 오슬로 왕궁의 실내 디자인에 참여하고, 노르웨이 예술을 후원하는 등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1856년에는 오슬로에 성 올라프 대성당을 건립하기도 했다.
1857년 오스카르 1세가 병에 걸리자, 조세핀 왕비는 섭정으로 임명된 장남 샤를과 갈등을 겪었다. 샤를은 반가톨릭 성향이었고, 어머니의 정치적 영향력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조세핀 왕비는 남편이 사망할 때까지 2년 동안 헌신적으로 간호했다.
3. 4. 왕비 사후 (1859-1876)
1859년 남편 오스카 1세가 사망하면서 요세피나는 국상이 되었지만, 1860년대 후반에 시어머니 데지레 클라리가 사망한 후에야 공식적으로 그 칭호를 받았다. 그녀는 프랑스 전통에 따라 검은색 대신 보라색을 애도의 색으로 사용했고, 평생 동안 이 색을 입었다. 국상이 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자선 활동과 가톨릭 신앙에 전념했다.[1]
칼 15세는 요세피나를 너무 구식이고 형식적이라고 여겼으며, 그들의 견해는 거의 일치하지 않았다. 칼 15세의 퇴폐적인 생활 방식은 왕실의 명성을 훼손시켰고, 요세피나는 이를 두려워했다.[1] 그러나 요세피나와 루이즈 왕비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 1866년, 요세피나는 의회 개혁에 대한 왕실 부부의 부정적인 견해를 공유했다.[1] 칼 15세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요세피나와의 관계는 개선되었고, 칼 15세가 프리메이슨이 된 후 가톨릭교와 개신교의 차이를 덜 보게 되었다.
요세피나는 정치적 사건에 대해 계속 정보를 얻었지만 더 이상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다.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에 맞서 오스트리아를 지지했다. 1870년, 교황 무류성 교리에 대해 거부감을 표명했다.[1] 그녀는 사촌 나폴레옹 3세가 폐위되었을 때 고통스러워했으며, 세당 전투 이후 투옥된 나폴레옹 3세에게 보아르네 가문의 일원임을 잊지 않겠다고 확신했다. 교황령 합병에 대한 혐오감을 표명했고, 1870년을 끔찍한 해라고 불렀다. 1871년 사망 직전 며느리 루이즈 왕비를 간호했다.
1872년 칼 15세가 사망하고 오스카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요세피나는 칼 15세 사망 당시 포르투갈에 있는 자매 로이히텐베르크의 아멜리를 만나러 가는 길에 파리와 엘 에스코리알을 방문했다. 칼 15세 사망 이틀 후 스웨덴으로 돌아왔다. 1873년 야코프 로렌츠 스투다흐가 사망한 후, 요세피나는 교황과 스칸디나비아 가톨릭 교회의 선교 주교 임명에 대해 협상했다.[1]
요세피나는 1862년 예테보리, 1866년 베르겐에서 개혁 이후 최초의 가톨릭 교회를 지원했다. 1865년 오슬로에 생 조셉 자매회 수녀들의 가톨릭 학교 설립을 지원했다. 1873년 가난한 기혼 여성과 가톨릭 신자를 위한 시설을 설립했는데, 이 두 기관은 독일 성 엘리자베스 수녀회 수녀들이 관리했다.
1873년 6월 13일, 요세피나는 스웨덴에서의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대중의 숭배를 받았다. 그녀는 "개신교 스웨덴이 가톨릭 여왕을 만장일치로 축하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라고 말했다.[1]
1875년, 교황 비오 9세를 로마에서 방문했다. 그녀는 '툴가른 백작부인'이라는 이름으로 변장하여 여행했고,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국왕의 영접을 받았다. 교황과의 만찬에서 요세피나는 왕족이 아닌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성찬을 받고 공개 만찬을 가졌다.[1] 로마 방문 후, 나폴리, 볼로냐, 밀라노를 방문했고, 잘츠부르크에서 전 프랑스 황후 외제니를 만났다.
요세피나는 1876년 스톡홀름에서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가톨릭 장례를 치렀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이제 집에 갑니다. 매우 행복합니다."였다.
참조
[1]
서적
Silvertronen, En bok om drottning Josefine av Sverige-Norge
Norlin Förlag AB
1950
[2]
서적
Drottning Josefina av Sverige och Norge
Veritas Förlag
2007
[3]
서적
Drottning Josefina av Sverige och Norge
Veritas Förlag
2007
[4]
서적
Drottning Josefina av Sverige och Norge
Veritas Förlag
2007
[5]
서적
Drottning Josefina av Sverige och Norge
Veritas Förlag
2007
[6]
서적
Drottning Josefina av Sverige och Norge
Veritas Förlag
2007
[7]
서적
Drottning Josefina av Sverige och Norge
Veritas Förlag
2007
[8]
서적
Drottning Josefina av Sverige och Norge
Veritas Förlag
2007
[9]
서적
Drottning Josefina av Sverige och Norge
Veritas Förlag
2007
[10]
서적
Drottning Josefina av Sverige och Norge
Veritas Förlag
2007
[11]
서적
Drottning Josefina av Sverige och Norge
Veritas Förlag
2007
[12]
서적
Drottning Josefina av Sverige och Norge
Veritas Förlag
2007
[13]
서적
Drottning Josefina av Sverige och Norge
Veritas Förlag
2007
[14]
서적
Drottning Josefina av Sverige och Norge
Veritas Förlag
2007
[15]
서적
Drottning Josefina av Sverige och Norge
Veritas Förlag
2007
[16]
서적
Drottning Josefina av Sverige och Norge
Veritas Förlag
2007
[17]
서적
Drottning Josefina av Sverige och Norge
Veritas Förlag
2007
[18]
서적
Drottning Josefina av Sverige och Norge
Veritas Förlag
2007
[19]
서적
Drottning Josefina av Sverige och Norge
Veritas Förlag
2007
[20]
서적
Drottning Josefina av Sverige och Norge
Veritas Förlag
2007
[21]
서적
Drottning Josefina av Sverige och Norge
Veritas Förlag
200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